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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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기독교인의 신앙 생활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복된 구원의 메시지가, 종종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근거로 적시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이 때로 극렬하게 비판하신 대상은 자신이 속한 유대교였지 다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경고도 교회 안의 이단적인 사상을 향한 것이었지 다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4:12)
구원이 기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할 때 자주 인용되는 성경구절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선포한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뒤의 정황을 살펴야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일으켜 세운 기적이 베드로를 통해 일어났고, 놀라움 속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자, 유대교 지도자들이 베드로를 잡아다가 물었습니다: “누구의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는가?”(4:7) 위의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자신들의 능력이 아닌, 다른 어떤 이도 아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권세로 이 기적이 일어났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를 염두에 두고,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3:6) 명함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고, “그가 성한 몸으로 서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이라” (4:10) 증언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그를 걷게 만든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지 말라” (3:12)고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은 구원보다는 치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질문도 누구의 권세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는지 물은 것이고, 베드로의 대답도 예수의 이름 외에는 이 치유가 가능할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절에 사용된 구원이라는 단어의 헬라어에는 “구원하다”와 “치유하다”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4장 9절에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번역본에 따라 9절은 “치유”로, 12절은 “구원”으로 혼용하여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공회를 통해 다른 종교 속에 내재되어 있는 기독교적 구원의 아름다운 여러 단면들에 대해 열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오고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교단에 따라서는 이렇게 종교간의 대화가 가능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이는 애초부터 타당하지 않은 질문입니다. “구원”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각 종교대로 추구하는 종교적 이상이 따로 있을 것인데, 기독교적 용어를 고집하여 구원이 있다 없다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또한 백번 양보해서 위의 말씀을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구원이 기독교 안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 하여도, 그것이 타종교를 배척하고 적대시할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도 종교적 실천의 관점에서 보자면 평생을 유대교인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도 받으시고,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시고, 유대교의 절기들을 지키며 사셨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유대교, 지금은 명확히 다른 종교인 유대교인으로 사셨으나 참 그리스도인이었던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은, 어쩌면 소속된 종교와 관련 없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주신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 복된 구원의 메시지가, 종종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근거로 적시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이 때로 극렬하게 비판하신 대상은 자신이 속한 유대교였지 다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경고도 교회 안의 이단적인 사상을 향한 것이었지 다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4:12)
구원이 기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할 때 자주 인용되는 성경구절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선포한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뒤의 정황을 살펴야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일으켜 세운 기적이 베드로를 통해 일어났고, 놀라움 속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자, 유대교 지도자들이 베드로를 잡아다가 물었습니다: “누구의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는가?”(4:7) 위의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자신들의 능력이 아닌, 다른 어떤 이도 아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권세로 이 기적이 일어났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를 염두에 두고,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3:6) 명함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고, “그가 성한 몸으로 서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이라” (4:10) 증언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그를 걷게 만든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지 말라” (3:12)고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은 구원보다는 치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질문도 누구의 권세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는지 물은 것이고, 베드로의 대답도 예수의 이름 외에는 이 치유가 가능할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절에 사용된 구원이라는 단어의 헬라어에는 “구원하다”와 “치유하다”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4장 9절에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번역본에 따라 9절은 “치유”로, 12절은 “구원”으로 혼용하여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공회를 통해 다른 종교 속에 내재되어 있는 기독교적 구원의 아름다운 여러 단면들에 대해 열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오고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교단에 따라서는 이렇게 종교간의 대화가 가능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이는 애초부터 타당하지 않은 질문입니다. “구원”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각 종교대로 추구하는 종교적 이상이 따로 있을 것인데, 기독교적 용어를 고집하여 구원이 있다 없다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또한 백번 양보해서 위의 말씀을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구원이 기독교 안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 하여도, 그것이 타종교를 배척하고 적대시할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도 종교적 실천의 관점에서 보자면 평생을 유대교인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도 받으시고,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시고, 유대교의 절기들을 지키며 사셨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유대교, 지금은 명확히 다른 종교인 유대교인으로 사셨으나 참 그리스도인이었던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은, 어쩌면 소속된 종교와 관련 없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주신 것은 아닐까요?
- 안신형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