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었습니다. 이 답이 매우 흡족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더러 복되다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이런 답이 나올 수 없었기에,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깨닫게 해주신 것이니 천복이라는 말씀이지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같은 질문을 던지시고, 똑같은 대답을 한다면, 예수님은 아마 이리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정답이긴하다만, 그게 복된 건지는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운 것일테니.” - 앤소니 드 멜로
20대 초반쯤, 신앙 생활 전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이미 20여 년을 변함 없이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지만, 내적으로는 계속해서 늘어가는 신학적인 질문들과 커져가는 신앙적 의문들로 씨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전까지의 내 신앙이 채 답변해주지 못하는 문제들도 있었기에 당황스럽고 힘겨운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수 많은 질문들이 겹겹이 쌓이던 어느 날,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냥 닥치고 믿을 것이냐, 아니면 그 의문들에 대해 정직하게 인정하고 답을 찾아 볼 것이냐? 나의 선택은 후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공정한 분이시라면, 진정성을 가지고 당신을 찾는 이의 갈급함을 외면하시거나 믿음이 없다 내치시진 아니하시리라. 오히려 정직한 의문들에 대하여 기꺼이 당신의 더 깊은 모습을 드러내시리라. 이런 확신에 근거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허용하고 나니, 제기하는 질문들이 보다 더 근원적인 주제들로 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유무부터 성경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나”라는 존재부터 “나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하여 의문부호를 달고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자발적 해체가 가져다 준 후폭풍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 유무에 의구심을 가지니 기도가 불가능해지고, 예배나 성경공부같이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 불편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삶의 기초가 되었던 신앙이 흔들리니 삶 자체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잠깐의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어둠의 끝에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의심을 품어 보십시오.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것에 대해 반문해 보십시오. 더 깊고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해보았던 경험으로 지금은 하나님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을 삐딱한 시각으로 읽어보았기에 성경 속에 계시된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합니다. 성경이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의심인들 품어 내지 못할까요? 의심이 나는데도 참고 있는 것이 오히려 불신앙일 수 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꺼림칙한 부분을 남겨둔 채로 무조건 믿는다한다면 그 꺼림칙한 부분이 불신앙인 것입니다.
지금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의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진리가 참이라는 확신 하에 그 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므로 오히려 올바른 신앙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베뢰아 교인들은 바울의 설교 말씀을 듣고 참으로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하였습니다. 듣고 배운 바를 스스로 고민하며 진정한 나의 신앙 고백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베드로가 받은 천복의 비결이었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었습니다. 이 답이 매우 흡족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더러 복되다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이런 답이 나올 수 없었기에,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깨닫게 해주신 것이니 천복이라는 말씀이지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같은 질문을 던지시고, 똑같은 대답을 한다면, 예수님은 아마 이리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정답이긴하다만, 그게 복된 건지는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운 것일테니.” - 앤소니 드 멜로
20대 초반쯤, 신앙 생활 전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이미 20여 년을 변함 없이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지만, 내적으로는 계속해서 늘어가는 신학적인 질문들과 커져가는 신앙적 의문들로 씨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전까지의 내 신앙이 채 답변해주지 못하는 문제들도 있었기에 당황스럽고 힘겨운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수 많은 질문들이 겹겹이 쌓이던 어느 날,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냥 닥치고 믿을 것이냐, 아니면 그 의문들에 대해 정직하게 인정하고 답을 찾아 볼 것이냐? 나의 선택은 후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공정한 분이시라면, 진정성을 가지고 당신을 찾는 이의 갈급함을 외면하시거나 믿음이 없다 내치시진 아니하시리라. 오히려 정직한 의문들에 대하여 기꺼이 당신의 더 깊은 모습을 드러내시리라. 이런 확신에 근거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허용하고 나니, 제기하는 질문들이 보다 더 근원적인 주제들로 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유무부터 성경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나”라는 존재부터 “나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하여 의문부호를 달고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자발적 해체가 가져다 준 후폭풍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 유무에 의구심을 가지니 기도가 불가능해지고, 예배나 성경공부같이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 불편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삶의 기초가 되었던 신앙이 흔들리니 삶 자체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잠깐의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어둠의 끝에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의심을 품어 보십시오.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것에 대해 반문해 보십시오. 더 깊고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해보았던 경험으로 지금은 하나님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을 삐딱한 시각으로 읽어보았기에 성경 속에 계시된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합니다. 성경이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의심인들 품어 내지 못할까요? 의심이 나는데도 참고 있는 것이 오히려 불신앙일 수 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꺼림칙한 부분을 남겨둔 채로 무조건 믿는다한다면 그 꺼림칙한 부분이 불신앙인 것입니다.
지금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의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진리가 참이라는 확신 하에 그 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므로 오히려 올바른 신앙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베뢰아 교인들은 바울의 설교 말씀을 듣고 참으로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하였습니다. 듣고 배운 바를 스스로 고민하며 진정한 나의 신앙 고백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베드로가 받은 천복의 비결이었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 안신형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