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이웃, 일본
일본 정부의 경제 전쟁 도발에 분노한 한국인들의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열기가 어느 여름 더위보다도 더 뜨겁습니다. 일본측의 경제적 손실도 예견되고 있어 이번 조치의 배경에 정치적 목적이 있었음을 짐작케합니다. 과거에는 주권강탈, 인권유린, 식민탄압, 경제수탈로, 현재에는 세계 경제의 시한폭탄이 된 부채 문제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방사능까지, 이래저래 불편한 이웃입니다.
위안부, 강제 징용 등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수 많은 죄과에 대한 사과와 배상 요구가 못마땅했나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기 싫은 것이겠지요. 아울러 불법 행위가 동반된 잘못으로 인정할 경우 감당해야할 배상이 두렵기도할테구요. 진정한 사과와 정당한 배상,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전범국 독일은 해냈습니다. 요구 받지 않은 사과까지도 수 없이 했으며, 국가에 대한 배상은 물론, 개인에 대한 배상도 여지껏 해오고있습니다. 피해자들이 그만하면 됐다 할 정도입니다. 또다른 전범국인 일본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배상은 커녕 그 죄과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많이 사과하지 않았느냐, 언제까지 계속 사과를 요구할 것이냐며 도리어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위 사과란 것을 한 이후 일본의 행태를 보노라면 그 진정성은 의심 받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누차 행한 사과에 부합하는 행동을 요구할 뿐입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독도선언문”을 통해 지적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의미 없는 사과의 반복이 아니라, 이미 행한 사과의 진정성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독일은 사과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그 사과가 통렬한 반성에서 온 것임을 온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올바른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 보입니다. 반성이 없는데 어찌 용서가 있을까요? 한국인들이 용서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누가복음 3:8)
용서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허락되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참된 회개(悔改)는 감정적 후회와 뉘우침에 머물지 않습니다. 감정을 넘어 다시는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영역에까지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실제로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지 않으면 거짓 회개일뿐입니다. 절반의 회개란 없습니다.
용서는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짓 눈물로 피해자를 속이거나, 힘으로 윽박질러 용서한다 라는 말을 들은 들, 그것이 참된 용서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처절한 반성을 토대로하여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냈을 때, 은총으로서의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며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런 용서의 경험이야말로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며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줍니다.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가 받을 진정한 용서의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습니다.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용서는 자기 합리화에 용기를 주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 불매운동을 더욱 가열차게 지속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일본이 용서 받을 기회를 얻도록 돕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 일본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민폐 덩어리 불편한 이웃에서 건강한 복덩이 이웃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분노는 불매운동의 불쏘시개로만 삼고자합니다. 완주는 연민의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위안부, 강제 징용 등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수 많은 죄과에 대한 사과와 배상 요구가 못마땅했나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기 싫은 것이겠지요. 아울러 불법 행위가 동반된 잘못으로 인정할 경우 감당해야할 배상이 두렵기도할테구요. 진정한 사과와 정당한 배상,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전범국 독일은 해냈습니다. 요구 받지 않은 사과까지도 수 없이 했으며, 국가에 대한 배상은 물론, 개인에 대한 배상도 여지껏 해오고있습니다. 피해자들이 그만하면 됐다 할 정도입니다. 또다른 전범국인 일본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배상은 커녕 그 죄과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많이 사과하지 않았느냐, 언제까지 계속 사과를 요구할 것이냐며 도리어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위 사과란 것을 한 이후 일본의 행태를 보노라면 그 진정성은 의심 받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누차 행한 사과에 부합하는 행동을 요구할 뿐입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독도선언문”을 통해 지적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의미 없는 사과의 반복이 아니라, 이미 행한 사과의 진정성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독일은 사과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그 사과가 통렬한 반성에서 온 것임을 온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올바른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 보입니다. 반성이 없는데 어찌 용서가 있을까요? 한국인들이 용서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누가복음 3:8)
용서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허락되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참된 회개(悔改)는 감정적 후회와 뉘우침에 머물지 않습니다. 감정을 넘어 다시는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영역에까지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실제로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지 않으면 거짓 회개일뿐입니다. 절반의 회개란 없습니다.
용서는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짓 눈물로 피해자를 속이거나, 힘으로 윽박질러 용서한다 라는 말을 들은 들, 그것이 참된 용서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처절한 반성을 토대로하여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냈을 때, 은총으로서의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며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런 용서의 경험이야말로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며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줍니다.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가 받을 진정한 용서의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습니다.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용서는 자기 합리화에 용기를 주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 불매운동을 더욱 가열차게 지속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일본이 용서 받을 기회를 얻도록 돕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 일본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민폐 덩어리 불편한 이웃에서 건강한 복덩이 이웃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분노는 불매운동의 불쏘시개로만 삼고자합니다. 완주는 연민의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 안신형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