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심이 곧 우상숭배니라.
우상숭배는 한국 교회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교적 제사와 사찰의 불상, 학교 정원에 있는 단군상 등이 대표적인 우상들로 여겨져 극렬한 반감의 대상이요 증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불상 훼손, 단군상 파괴, 제사를 둘러싼 가족 간의 갈등과 불화를 전하는 뉴스들은 낯부끄러운 기독교의 자화상입니다.
성경은 우상숭배를 강한 어조로 금합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온 율법과 예언서의 두 가지 핵심 주제는 첫째, 우상을 섬기지 말라, 둘째,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어 살라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금지는 종교적인 규례 같고, 공의로운 삶은 사회적인 윤리 규범처럼 보이나, 실상 이 두 가지는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뿌리는 탐심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심리의 기저에는 배타적인 풍요의 복을 비는 마음이 있습니다. 풍요의 신인 바알이 구약의 대표적인 우상 가운데 하나인 이유입니다. 불의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나의 이익과 기득권 보호를 욕망할 때, 양 한마리를 가진 사람의 양을 빼앗아 내 양 100마리를 채우거나, 내게 유리한 판결을 얻기 위해 뇌물을 쓰는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법이 공동체 내의 약자들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든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신이 최고의 신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은 재물이 곧 우상임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든, 아니면 하나님 섬기듯 재물을 섬기든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않다면 하나님을 그저 인간들의 탐욕스런 요구에 자판기처럼 “물질 축복”을 쏟아내는 저급한 신으로 전락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로새서 3:5)
인간의 탐욕을 충동하는 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우상은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합니다. 부수어야할 우상은 불상이 아니라 내 안의 탐욕입니다. 깨트려야할 우상은 단군상이 아니라 내 안의 탐심입니다. 우상을 교회 밖에서만 찾았던 까닭에, 통제 받지 않은 채 거대하게 자라버린 탐심이 결국 교회를 삼켜 버렸습니다.
한국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물질 축복의 복음이 기여한 바가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주된 걱정이던 전후시대에, 물질적 풍요의 약속은 한국의 산업화와 더불어 교회의 양적 성장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주었습니다. 갖가지 경제 지표와 실제 생활 수준을 보면 한국은 이미 꿈에 그리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보릿고개가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이 주어진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 축복의 지속적 강조는 득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루의 먹거리를 넘는 물질 추구는 언제든 신앙인들을 물신숭배(mammonism)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전해야할 메시지는 풍요로운 삶의 환상보다는 배금주의(拜金主義)에 대한 경계여야 합니다. 넘치는 것은 언제나 나눔의 대상이지 축적의 대상이 아님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할 때입니다. 지구촌 어느 구석에라도 하루의 끼니를 염려하는 이웃이 있는 한, 이 기도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와 더불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에 더욱 힘쓰고, 한걸음 더 들어가 가난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파악하여 그 구조를 타파하려는 노력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교회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성경은 우상숭배를 강한 어조로 금합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온 율법과 예언서의 두 가지 핵심 주제는 첫째, 우상을 섬기지 말라, 둘째,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어 살라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금지는 종교적인 규례 같고, 공의로운 삶은 사회적인 윤리 규범처럼 보이나, 실상 이 두 가지는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뿌리는 탐심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심리의 기저에는 배타적인 풍요의 복을 비는 마음이 있습니다. 풍요의 신인 바알이 구약의 대표적인 우상 가운데 하나인 이유입니다. 불의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나의 이익과 기득권 보호를 욕망할 때, 양 한마리를 가진 사람의 양을 빼앗아 내 양 100마리를 채우거나, 내게 유리한 판결을 얻기 위해 뇌물을 쓰는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법이 공동체 내의 약자들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든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신이 최고의 신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은 재물이 곧 우상임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든, 아니면 하나님 섬기듯 재물을 섬기든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않다면 하나님을 그저 인간들의 탐욕스런 요구에 자판기처럼 “물질 축복”을 쏟아내는 저급한 신으로 전락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로새서 3:5)
인간의 탐욕을 충동하는 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우상은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합니다. 부수어야할 우상은 불상이 아니라 내 안의 탐욕입니다. 깨트려야할 우상은 단군상이 아니라 내 안의 탐심입니다. 우상을 교회 밖에서만 찾았던 까닭에, 통제 받지 않은 채 거대하게 자라버린 탐심이 결국 교회를 삼켜 버렸습니다.
한국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물질 축복의 복음이 기여한 바가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주된 걱정이던 전후시대에, 물질적 풍요의 약속은 한국의 산업화와 더불어 교회의 양적 성장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주었습니다. 갖가지 경제 지표와 실제 생활 수준을 보면 한국은 이미 꿈에 그리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보릿고개가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이 주어진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 축복의 지속적 강조는 득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루의 먹거리를 넘는 물질 추구는 언제든 신앙인들을 물신숭배(mammonism)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전해야할 메시지는 풍요로운 삶의 환상보다는 배금주의(拜金主義)에 대한 경계여야 합니다. 넘치는 것은 언제나 나눔의 대상이지 축적의 대상이 아님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할 때입니다. 지구촌 어느 구석에라도 하루의 끼니를 염려하는 이웃이 있는 한, 이 기도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와 더불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에 더욱 힘쓰고, 한걸음 더 들어가 가난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파악하여 그 구조를 타파하려는 노력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교회가 되어야하겠습니다.
- 안신형목사
보스톤감리교회는 열린 마음, 열린 생각, 열린 문 이라는 모토를 바탕으로, 다문화적인 열린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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